


Esoruen
B-PROJECT: 신가리 미로쿠×아구이 에리제×테라미츠 유즈키
운명이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달라지는 법이었다. 오늘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 출근하는 길에 버스를 탔는지 지하철을 탔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같은 사소한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소한 것 까지? 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선택들이 모여 거스를 수 없는 미래를 만드는 현실 속. 테라미츠 유즈키는 제가 놓쳐버린 인연이 어떤 선택지점에서 어긋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있잖아, 미쨩. 이거 어때? 어울려?”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는 살가움이 넘쳤다. 원래도 나긋나긋 유혹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긴 하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가 불러주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더 음성의 달콤함을 부각시켜준다. 유즈키는 하루히와 함께 방을 정리하다 말고 거실에서 들리는 대화에 마음이 빼앗겨, 빗자루를 든 채 우두커니 멈춰 섰다.
“음,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군, 이 아니라~. 좀 더 자세하게!”
“자세하게? 글쎄다. 나는 화장품은 잘 모르지만, 너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정말?”
행복함이 넘치는 웃음소리. 평범한 연인사이의 대화.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반짝거림이, 저기 저 거실에서는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로쿠와 에리제가 연인관계가 된 것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반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길지 않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반년으로는 설명 할 수 없지. 연인이 된 게 반년 전일 뿐, 실제로 알고 지낸 시간은 1년하고도 3개월이 조금 넘으니까.
“아아, 토노랑 에리제는 뜨겁네~. 거 듣고 있는 사람들도 신경 써 주지. 그렇지?”
“……응?”
“뭐야. 못 들었어?”
“아아. 미안해, 하루…. 뭐라고 했었어?”
사실은 하루히가 뭐라고 했는지 다 들었었다. 하지만 굳이 모른 척을 하는 건, 하루히가 한 말에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쌍둥이 형제라면, 이런 별것 아닌 푸념은 두 번 이야기하기 싫어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할 사람이니까. 유즈키는 머리 좋게도 그걸 노린 것 뿐.
“아냐, 아무것도. 그것보다 바닥은 다 쓸었어?”
“응. 걸레질만 하면 될 거야.”
“그래? 아, 그럼 내가 걸레 빨아올게! 기다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쌍둥이 형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운차게 거실로 나간다. ‘토노, 너무 붙어있지 마!’ 장난스러운 핀잔에 에리제가 웃는 것 같았지만, 유즈키는 웃을 수 없었다.
미로쿠가 에리제와 엮이게 된 것은 모두 그날, 제의되어 온 잡지 촬영을 미로쿠가 수긍했기 때문이었지. 유즈키는 1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었지만 정확하게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데뷔 후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잡지 촬영 스케줄, 같이 촬영하게 된 것은 한참 선배인 여자 아이돌. ‘누구든 좋지만 킬러킹 멤버 중 한 명과 촬영하고 싶다. 이왕이면 키가 큰 사람이 좋다.’ 그게 상대, 에리제의 유일한 전언.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게 미로쿠였고, 그게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지나치게 심플한 이야기였지만, 그렇기에 유즈키는 더 아쉬움이 남았다.
‘만약 내가, 그 제안을 받았다면.’
그때 자신은 눈앞에 내밀어진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바보같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미로쿠가 기회를 낚아채 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 물론 미로쿠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기회를 날려버린 제게 있는 거겠지.
생각해도 바뀌지 않는 것을 반복해서 곱씹으니 머리가 아파온다. 유즈키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막 정리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에리제가 돌아가 있으면 좋겠다. 그 얼굴을 오래 눈동자에 담지 못한 건 후회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미로쿠와 사이좋게 있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자포자기하며 눈을 감은 유즈키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기분 탓일까. 그는 무거운 마음에 비해 제 몸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즈키, 일어나! 야사마루 씨가 왔어!”
“…응?”
오늘은 스케줄도 없는 날이라 야사마루가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무슨 일로 그가 숙소까지 온 거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거라면 이해는 가지만, 그랬다면 연락을 줬으면 좋을 텐데. 상황파악이 안 된 유즈키는 엉겁결에 일어나 하루히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선 미로쿠와 아카네, 그리고 야사마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전부 다 모인거지?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좋은 일감이 들어와서 알려주러 왔어!”
어라?
야사마루의 말은 낯설지 않았다. 분명, 저 말은.
“다름이 아니라, 여성잡지의 표지모델이랑 그 잡지에 실릴 화보를 찍게 됐는데… 다른 그룹도 아니고, 킬러킹의 멤버 중 한 명과 찍고 싶다고 했다는 거 아니겠어? 상대 모델은 이름을 들으면 알 텐데, 아구이 에리제라고….”
“자, 잠깐….”
“응?”
제가 지금 꿈이라도 꾸나? 유즈키는 당황해서 야사마루의 말을 끊었다.
“지금… 몇 월 며칠이죠?”
“어머, 그건 왜? 4월 23일이야. 2016년 4월 23일!”
“…….”
말도 안 된다. 제가 잠들기 전 까지는, 분명 2017년 7월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과거로 와있고, 자신이 가장 후회했던 선택의 순간이, 이렇게, 눈앞에…
“어쨌든, 이 일. 누구 하고 싶은 사람….”
“저요. 제가, 제가 할게요.”
“어, 유즈키?”
단호한 대답. 고민조차 하지 않은 지원에 하루히는 깜짝 놀라 유즈키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다들 왜 자신이 이렇게 절박한지 모르겠지. 몰라야 한다. 알면, 또 다시 기회는 사라질지 모르니까.
이번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도대체 어쩌다 과거로 돌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 과거로 돌아온 건지 꿈인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테라미츠 유즈키가 할 일은 단 하나 뿐.
“제가 하고 싶어요. 꼭, 제게 시켜주세요.”
미로쿠에게 넘겨줬던 기회를, 이번에야말로 제가 붙잡는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그는 이게 악몽이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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