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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

언라이트: 베른하르트 자이페르트×라페 에일레르×프리드리히 자이페르트

 [재정비 완료. 루프 A를 실행합니다.]
 [본인 확인을 시작합니다. 1, 2, 3 … … 10, 00. 라페 에일레르,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제249번째 루프 A. 돌입합니다.]

 거슬릴 만큼 귀에 익은 기계음을 뒤로하고 게이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도착지는 언제나와 같이 『디아이』의 안쪽. 아니나 다를까 도착 전부터 이미 몇 차례 전투가 지나간 모양이었다. 익숙해지다 못해 친밀해진 피 냄새가 귀환 아닌 귀환을 반겼다. 지긋지긋한 전장의 향기였다. 어서 끝내고 싶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한숨을 틀어막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러다 천 번까지 채우겠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통행에 방해되는 것을 발로 치웠다. 아마도 인간이나, 이생물의 시체겠지. 이 백몇 번째 본 탓에 긴장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장애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나는 순조롭게 케이오시움이 있는 레드 스론까지 도착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베른하르트와 미리안이 대치하고 있으리라. 전과 다른 바 없는 상황에도 아직 늦지 않았다며 애써 저를 달래며 자리를 옮겼다.
 "어째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
 낯익은 목소리에 가슴이 저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마지막은 몇 번이고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붉은 달만이 은은하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어."
 미리안이 베른하르트의 말에 답했다. 아니, 아니다. 거짓은 아니나 참 또한 아닐 터다. 그는 이미 로쏘의 수중에 있다. 나는 이미 백몇 번째에서 확인했었다.
 그래? 베른하르트가 로쏘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 했다. 이전 루프에서도 그랬듯, 미리안이 그 앞을 막아 섰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너무 늦게 도착했다. 용이 있는 곳까지 향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번에도 누구 하나 구하지 못 하는구나.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베른하르트가 나동그라짐과 동시에 모든 사고가 멈췄다. 본능이 전신의 신경을 지배했다. 나는 누군가 밀어낸 것처럼 튀어나가 로쏘와 미리안의 앞에 서 용과 마주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좋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차피 나는 죽지 않는 몸이다. 이번만큼은 실패해선 안 된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용의 콧등에 상처를 입혔으나, 이내 거대한 턱이 나를 삼키고 시야가 점멸했다.
 누군가 "네가 어째서."라고 외친 것만 같았다.

*

 [루프 A종료. 루프 B를 실행합니다.]
 [본인 확인을 시작합니다. 1, 2, 3 … … 10, 00. 라페 에일레르,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제249번째 루프 B. 돌입합니다.]

 루프 A는 성공한 걸까? 결과는 알 길이 없었다. 기계음은 필요한 것 이외엔 무엇도 말해주지 않고, 나는 내가 '사라진' 이후의 일을 알지 못 한다. 아마 이번 일을 끝마치고 나면 알게 될 터다. 무사히 성공했다면, 루프 B를 다시 시도하거나 무로 돌아갈테지. 기왕이면 영영 존재조차 없어졌으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법 먼 거리에서 외침이 들렸다. 전원, 위치로!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고개를 흔들어 사념을 떨쳤다. 멀리, 블루 피크에서 레지먼트 대원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저 중엔 프리드리히도 있을 것이다. 빠르게 적대 생물을 베어내며 근처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대원의 수가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이 루프 B도 늦은 모양이었다.
 블루 피크에 도달하자, 10알레에 이르는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켰다. 몇분 남짓되는 짧은 시간테 용과 근접한 거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허무하게 타버려 재로 돌아갔다.
 혼란도 잠시, 살아남은 레지먼트 대원들이 요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질긴 가죽을 통과하지 못한 탄알이 이곳저곳에 떨어졌다. 다른 적대 생물들이 그 틈을 타 계속해서 밀려들어왔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여기서 더는 물러서지 못 한다. 아마도 프리드리히가 한 판단 역시 제가 한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살아남은 인원은 극소수. 거대한 용이 화염을 뿜어내면 그걸로 끝이다. 프리드리히가 기민하게 C.C.에게 무전을 넣는 모습이 보였다.
 "C.C.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원망 섞인 무전의 답은 아마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혹은 '조금만 더 버려달라'는 말. 그녀 또한 필사적으로 케이오시움 확보에 주력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인지, 프리드리히는 그 이상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희생을 각오했다.
 나는 그가 수류탄 핀을 뽑기 전, 신속하게 라이플로 용을 저격했다. 내 라이플은 대원들이 쓰는 것과 다르게 개조에 개조를 더해, 용의 질긴 가죽에 작은 상해를 입힐 정도가 되었다. 탕. 작달막한 흠집이 난 용은 지체 없이 내게로 시선을 돌려 달려들었다. 루프 A에서 마주했던 것과 같은 거대한 턱이 나를 향했다.
 "──!"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무엇인가 외쳤지만, 용의 그르렁대는 소리와 겹쳐 들리지 않았다. 용이 뿜어내는 불길에 타들어가며, 이걸로 끝이 나기를, 단지 간절히 바랐다.

*

 [본인 확인을 시작합니다. 1, 2, 3 … … 10, 00. 라페 에일레르,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제249번째 루프 A, B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목표 도달 실패.]

 익숙한 기계음이 귓가를 스쳤다. 결국, 전부 실패했구나. 아마 250번째 루프는 시도조차 못 할 것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속삭였다. 너는 무로 돌아갈 거야.

 [메인 시스템 오류. 루프에 돌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 나는 이걸로 무로 돌아가겠네.

 [오류: 엔트로피 초과.]
 [엔트로피가 초과되었습니다. 제250번째 루프에 돌입할 수 없습니다.]

 저 기계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더라? 아무리 기억해내려 애써도 잊힌 지 오래되어 떠올릴 수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전장의 피 냄새, 외마디 비명. 거기에 두 사람의 얼굴뿐.
 내 바람은 무엇이더라? 무엇을 위해 이 반복을 계속했지? 끝을 주고 싶었다. 그래, 두 사람에게 끝을 주고 싶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연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론, 전부 그르쳤지만. 전부 허무했다. 내 노력이 헛되었다 화낼 기운도 없었다.
 당신들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음먹어놓곤, 내가 안식에 드는구나.
 눈을 감고 천천히 자신을 곱씹어 보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나? 아마도 그렇겠지. 지금도 사랑하나?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도 마음이 아플 리 없었다.
 가능하면, 당신들에게 마지막의 마지막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메인 시스템 오류.]
 [여행자 '라페 에일레르'의 언인스톨을 시작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 한 채 끝을 맞이하고야 말았어.

 [1%, 2%, 3% … … 100%.]
 [여행자 '라페 에일레르'의 언인스톨이 완료되었습니다.]


 안녕, 잘 있어. 더는 헤매지 않으면 좋을, 사랑스러운 내 사람들아.

 *

 [시간 여행 시스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규 여행자 '──'의 인스톨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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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Water - DJ Okaw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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