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
메이플 스토리: 매그너스×르네
삼백 번째.
르네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보라색 하늘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손등으로 뜨거운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눈동자에서는 이미 이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음도 시야도 감각도, 모든 것이 뿌옜다. 등 뒤로 거친 타격음이 들렸으나, 그것마저도 이내 희뿌옇게 잦아들었다. 르네는 가슴에서 투둑 떨어져 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품에 안긴 것이 그 감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눈가에 잔떨림이 아롱졌다. 시야에 둥근 빛이 맺히다가 암전되었다가 사라졌다. 머리가 저절로 툭 떨어져 내렸다. 르네는 희멀건 시야로 정인의 얼굴을 보았다.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푸르른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는 늘 뜨거웠다, 그 아래 붉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던 걸까. 르네는 반쯤 부서진 갑옷이 제 가슴 아래 눌려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아주 차가웠다.
주변에서 무언가 말한다. 저를 향한 말인 것 같지만 들리지 않았다. 르네는 멍한 머리로 아주 오래 전을 회고했다. 조금 부끄러운 듯이, 어쩐지 수줍고 후련한 기색으로,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사랑해, 르네.’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매그너스는 마침내 뜨거운 사랑으로 녹아내렸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르네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그렇게나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그가 그녀를 위해 검은 마법사를 지키는 역을 자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그 왕좌를 버리고 누군가의 앞에 엎드리면서까지 르네를 사랑하고 싶어 하리라고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르네를 위해 그녀의 버팀목에 충성하리라고는, 그녀의 이명이었던 번견이 그의 것으로 옮겨붙을 정도로 온 몸을 다해 부딪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믿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부서져, 뇌가 엉킬 정도로 복잡한 생각과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거운 감정에 억눌려 비명을 지르는 르네를 위해, 매그너스는 르네를 죽일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매그너스는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너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하지만 르네가 죽음을 원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을 되돌아 부서져 버린 르네를, 다시 한 번 으깨버린 속죄로, 매그너스는 르네에게 죽음을 바치려 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無로 향하는 길이었다.
매그너스 님, 매그너스 님... 당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르네는 망연히 부서져 버린 헬리시움을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하고 붉은 자국으로 얼룩진 갑옷을 입은 매그너스를 바라보았다. 매그너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다는 양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를 보는 르네는 어쩔 도리 없이 불행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폭군 매그너스는 번견 매그너스가 되었다. 그는 검은 마법사의 충성스러운 개였다. 난폭하고 잔혹했다. 송곳니 같은 검은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르네는 망연히 매그너스를 바라보았다. 망연히, 망연히 매그너스가 부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막지도 부추기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매그너스는 미쳐 버렸다. 정신이 나가 버렸다. 적어도 르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매그너스는 그녀가 알고 있던 그를 완전히 죽여 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난폭하고 사나운, 솔직하지 못한 모난 말투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곁을 지나가기만 해도 짜증난다며 질색을 하던 사람을 보고서도 빙긋이 웃었다.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당연스레 여기던 남자가 개를 자처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과 말투는, 행동 하나하나에는 어떠한 종류의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르네에게는 그것이 광인처럼 보였다. 그것이 르네를 광인으로 만들 것 같았다.
르네가 알던 매그너스라는 남자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연기라고 생각하기에는, 그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어느 날의 싸움에서 매그너스가 약지 두 마디를 잘려 왔을 때 르네는 기어이 발작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왜 이래요, 왜 이래요,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왜, 왜, 대체 왜!’
르네는 비명을 지르며 몰려오는 고통에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피가 나도록 제 살갗을 긁고 성대가 망가지도록 소리를 질러도 고통은 멎지 않았다. 몸을 산 채로 갈아버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왜, 왜, 아프다는 소리보다 먼저 의문을 외치며 르네는 까무룩하게 생각을 던졌다.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그것은 르네의 지병이었다. 르네는 ‘세계를 되돌아갈 수 있는 힘’ 이 있었다. 수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끝없는 평행세계를,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망가지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르네는 돌이킬 수 없이 부서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버티고 있던 것이, 정작 그 사람이 더는 행복해질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 것을 보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버틸 수 없어졌던 것이다. 혼자 잊혀지고 혼자 불행해진 르네는 죽기 위해 현자를 찾았다. 찾은 곳에서 안식처를 찾아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죽지 않아 버렸다.
죽지 않은 르네는 매그너스를 사랑해 버렸다.
매그너스는 난폭한 사내였다. 감히 사랑을 외치는 건방진 계집을 죽인 것은, 그의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그 본인조차 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르네는 불사를 지닌 존재였고,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매그너스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겠지만, 결국 그렇기 때문에 르네는 매그너스의 손에 몇 번이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검날보다도, 날카로운 말로 난도질당하는 것이 더 아팠다. 매그너스 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ㅡ고, 무덤히 말할 수 있기까지 르네는 지독하게 망가져 갔다. 끝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망가지는 것도 끝없었다. 르네는 우울을 앓으며 시름했다. 급격하고도 꾸준하게 부서져 갔다.
불사의 존재. 그 영생의 매커니즘은 육신과 영혼이 하나라는 것이었다. 영혼은 칼로 베어도 베이지 않는다, 마법으로 짓이겨도 상처입지 않는다. 멸하지 않는 몸, 상처입어도 회복하는 살덩이. 그러나 그것은 정신이 망가질수록 몸도 함께 망가진다는 소리였다. 육체가 미쳐가고 있었다. 무한의 루프로 망가져 버린 정신체는 사랑하는 이의 고문을 버틸 수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이 달에 두어 번씩 찾아왔다. 산 몸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발작은 정신이 혹사당할수록 더 격하게 요동쳤다. 그녀의 주인은 마취제조차 해독해 버리는 육신을 가여이 여겨 강한 독약을 주사해 잠들도록 했다.
‘르네, 르네, 그러지 마. 제발...’
내가 대신 아프게 해 줘. 애끓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우는 것도 같았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르네는 울며 바닥에서 바르작거렸다. 마구잡이로 바닥을 긁었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쥐며 애원했다. 르네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죽고 싶었다, 죽을 수 있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제발 끝내고 싶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사는 것으로, 죽는 것보다 더할 행복은 찾을 수가 없다고. 아니, 그런 것보다 당장의 고통이 너무 독해서. 마구잡이로 소리치는 말에 애원이 섞였다. 르네는 자신이 죽여 달라고 말했음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에 가까운 암전이 찾아왔기 때문에.
시야에서 검은 장막이 걷혔을 때 르네는 자신이 전장의 중심에 앉아 있음을 알았다. 회고와 현실이 이리저리 뒤엉켜 잘 구분할 수 없었지만, 무한 번에 가깝게 경험해 본 것이기에 어떻게든 분리해낼 수 있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지치면 안 되는데, 매그너스 님은 아직 삼백 번 밖에 죽지 않았는데.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르네는 퍽 소리에 목을 뒤로 휘청거렸다. 정신을 조금 가다듬어 보니 볼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여 봤지만 한 쪽 눈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아마 화살에라도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르네는 가만히 품에 안긴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번의 매그너스 님은 유달리 르네에게 화를 자주 냈다. 르네가 자주 다쳐 오는 것을 질색하며 싫어했다. 그렇게 우물 같은 눈깔로 멍하니 있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공연히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화를 낸 뒤에 늘 상처를 봐 주는 것을 알았다. 의학과 관련된 책이 책상 위에 자주 올려져 있곤 했다. 매그너스 님도 참, 귀여운 사람이라니까. 르네는 언뜻 웃었다. 시야가 보이지 않으면 시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 눈에 꽂힌 것을 뽑아내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질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단호히 손을 움직이는 르네는 여즉 멍하니 미소 지은 채였다.
끝없는 루프를 거치며 깨달은 것이 있다. 다른 갈래의 매그너스 님은 같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이었다. 르네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르네를 이방인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울타리 밖의 사람이기 때문에 함부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완연한 타인으로 다가가고 인식해야 했다. 당연했던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야 했다. 매그너스는 특히나 그 울타리의 벽이 높은 사람이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짓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로 만나서, 가장 처음부터 같은 유대를 쌓아 간다. 그러나 르네는 할 수 있었다. 매그너스를 사랑하니까. 그에게 다시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는 얼굴을, 예쁘게 웃는 얼굴을 하는 것 따위는 식은 죽 먹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정말로 괜찮을 것 같았다.
르네는 단 한 번도 실패할 수 없었다. 실패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유혹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면 그에게 사랑받는 가장 편하고 안전한 길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매그너스가 사랑해 준 최초를 알고 있었다. 르네는 최선을 다해 올곧게 부딪혔다. 죽고, 죽고, 죽고, 죽으며, 죽더라도 사랑한다 속삭였다. 그렇게 한참, 매그너스는 다시 르네를 사랑했다.
가끔 되돌아가다 보면 이전 죽은 그의 사랑이 미치도록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묵직한 변화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마다 목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럴 때, 곧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으로 버텨서는 안 되었다. 이번의 매그너스는 그 때의 매그너스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의 사람을,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사람에게 투영해 봐서는 안 된다. 르네는 올곧게 상처를 받아 삼켰다. 매그너스를 상처 입히느니, 제 눈동자에 담겨 있는 것이 그가 아니라 과거의 허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르네는 매그너스를 사랑했다. 자신을 상처 입히는 매그너스도, 자신을 모르는 매그너스도, 고통과는 별개로 사랑했다.
그렇게 사랑했으니 매그너스도 르네를 사랑했던 것이다. 병들면서도 올곧은 사랑은, 천하의 매그너스마저 비틀거리게 했던 것이다.
고통이 걷히고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보인 것은 비탄에 젖은 정인의 얼굴이었다. 르네는 잔류하는 둔통에 콜록거리다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한 쪽이 잘린 뾰족한 뿔도, 한 쪽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도, 제멋대로 뻗친 청회색 머리카락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흙색 피부가 어쩐지 조금 창백해 보였다. 르네는 익숙하지 않은 빨간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르네.’
르네, 르네. 매그너스는 그녀의 손을 소중히 감싸 쥐고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매그너스는 몸집만큼이나 손도 커다래서, 그녀의 손 두 개를 한 손으로도 쥘 수 있을 정도였다. 투박하고 둔탁한 손 위에 놓인 제 가는 손이 꼭 인형 같았다.
손끝이 약간 붉었다, 바닥을 긁다 손톱이라도 빠진 모양이었다. 매그너스는 사나운 눈매를 누그러트리곤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다 나아 버린 손보다 그것이 훨씬 이상해 보였다. 르네는 망연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없던 것으로 돌리기에는, 눈앞의 매그너스가 너무 바뀌어 있었다. 꿈꾸는 것조차 절망이 될 정도의 순정적인 모습이었다. 그 사랑의 형태는 자신의 것을 닮아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다.’
뭐가요? 그녀는 자그맣게 물었다. 매그너스는 울음 섞인 쇳소리로 ‘전부.’ 라고 대답했다. 하나하나 늘어놓기에는 감정이 지나치게 벅차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르네는 매그너스가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이 두려운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히... 분명히 자신은, 살아가 버리고 말 것이었다.
사랑과 살아는 같은 자로 이루어져 있다. 르네는 그렇게 존재하는 종족이었다. 오직 사랑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그너스가 우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 굽힐 줄 모르는 오만한 남자가, 잔학무도하고 사나운 남자가 미안하다며 울고 있었다.
탁 풀린 시야에 현실이 아지러졌다. 그러고 보면 매그너스의 잠들지 못하는 밤에 르네는 언제나 곁에 있었다.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불만 따위를,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투덜투덜 웅얼거리며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자장가를 속삭여 주면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가장 연약하고 취약한 시간을 그녀에게 내어 주었다. 매그너스가 불면증이 있다는 소리를 그의 부하에게 들었을 때 믿지 못했던 것도 기억한다. 그는 언제나 제 곁에서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표정으로 평온하게 수면을 취했으니까.
르네는 눈물이 그득 고인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노란 색이었던 것, 파충류처럼 가느다란 동공과 연둣빛이 아릇하게 스민 노란 홍채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묘안석처럼 변해 있었다. 이것은 그가 검은 마법사에게, 르네의 주인에게 완전한 충성을 맹세한 증거였다. 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친 것인가. 르네는 그 맹목의 크기에 골이 띵했다. 매그너스가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다.
“......나를, 사랑해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어떤 대답을 들어도,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대답하지 않기를 바랐다.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물었었다. 그는 언제나 입을 다물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기한 그 침묵에마저, 상처입고 말아서. 그 질문은 어떻게든, 그녀 스스로를 상처 입힐 것이기 때문에.
‘사랑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대답이, 찌르르 아팠다. 그는 울면서도 웃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 사랑에 망가질 것 같았다.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너지는 자신을 그가 받아들 것만 같았다. 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꾸만 그를 찾게 될 것 같았다. 우스운 일이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종족이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다니. 이미 사랑하고 있는 주제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다니. 받는 것에 기대버릴 것이 두려워,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음에도. 우스운 일이다.
매그너스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영원히 사랑을 알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 적어도 그 이상 상처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익숙한 상처니 괜찮을 것 같았다. 타는 듯이 외롭고 괴로워도 그 시간에 멈춰 있고 싶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것이었다며 자신을 위해 변명하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억눌렀다. 그러는 사이에 매그너스가 자라 버렸다. 멈춰 있는 르네를 앞질러 버리고 말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혐오하던 남자가 사랑한다고 말하기까지.
눈 옆이 따가웠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감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숨 쉬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르네는 가슴팍에 꽂힌 것을 아무렇게나 뽑아내어 던졌다. 찾아오는 격통보다 붉게 젖은 천 위로 달라붙어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더 선명해 보였다. 르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끝을 꼬았다. 떨고 싶어서 떠는 것은 아니었다.
매그너스는 서툰 남자였다,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남자에게 끝없이 사랑을 퍼부어 자라게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는 아주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도,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붙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참 주저했었던 것이다.
주뼛거리며 품에 고개를 묻던 어린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르네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사랑을 속삭이는 어른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기나긴 준비 끝에 마음을 고백한 매그너스는 르네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어서,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서, 강렬한 혐오로 무너져버린 르네를 붙들고 쫓아와 사랑을 퍼부을 정도로, 비명을 지르고 밀쳐내는 그녀의 말에 지독하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도, 가장 믿었던 것에 배신당한 표정을 하고서도, 그러고서도 마음을 다잡고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서.
그래서 르네가 여기에 있었다.
삼백 번째 매그너스는 죽었다. 판테온 측의 군사가 지나치게 많았다. 최상층의 지붕이 반쯤 무너지고, 적들은 어째서인지 르네의 약점을 알고 있었고. 돌이켜 보니 그들의 손에 너무 죽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매그너스를 죽일 때까지만 르네를 죽이며 붙잡아 놓으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르네는 도망가라고 소리쳤지만, 매그너스는 르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터라 허무하게 빈틈을 내어주고 말았다. 이렇게 간단히도 죽을 수 있구나, 르네는 반쯤 잘려나간 매그너스의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 그 머리 위에 턱을 괴었다. 이곳저곳 잘려 평소보다 가벼워진 시체의 무게감이 참 사랑스러웠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화살도 검도 빽빽하게 꽂혀 있는데 어째서인지는 모를 일이다. 킥킥 웃다가 문득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지 못하고 있기에 눈을 감겨 주었다. 그래서 이제 라임색 눈동자는 볼 수가 없었다. 르네는 가슴이 무너지는 통증을 느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흐윽.”
켁, 하고 울컥 검은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저릿한 팔다리에서도 질척질척한 검은 것이 새어나왔다. 타르 같지만 손에 쥐이지 않았다. 르네는 그것이 제 본신의 일부임을 알았다. 새까만 공간이 질질 새어나오며 아지랑이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비가 쏟아져 내렸다. 르네의 검은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늘어졌다. 삼백 번째 매그너스의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도 빗물에 쓸려 내렸다. 이런 것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죽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르네는 살아 있었다. 매그너스는 죽었다. 다른 세계에서라도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ㅡ르네가 움직이는 것 뿐.
르네는 각오하고 있었다. 매그너스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아마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영원이 지나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르네는 각오하고 있었다. 다시 영원을 되돌아갈 각오를, 미치게 되더라도 되돌아가고 되돌아가서, 사랑하는 매그너스를 행복한 최후까지 지켜볼 각오를. 그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게 하고, 그를 행복하게 해서, 그리고... 그리고, 그 뒤는 없었다. 르네는 그 모든 것이 끝난 뒤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돌아가도, 어떤 세계로 발을 디디고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녀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죽은 매그너스 뿐일 것이다. 이미 죽은 매그너스의 세계에서 혼자 살아 연극을 하는 꼴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르네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매그너스도 만나지 못한 채,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각오하고 있었다.
무한의 생을 되돌아가는 것을, 온 몸을 부수며 무한 번의 루프를 끝내고 영원의 생 동안 혼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영영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꼴이 되는 것을, 영영 그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눈이 새빨간 매그너스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르네는 그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각오했다. 눈이 빨간 매그너스는 무리한 충성의 대가로 무자비하게 죽었다. 분노와 격정에 참혹하게 찢겨 죽었다. 그것마저 그가 한 짓에 비해서는 다정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르네가 웃어 주자 따라 웃었다. 죽기 전에 너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러 갈 것이라고 속삭이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죽었다. 르네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매그너스를 만나러 시간을 되돌아갔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짓이었다. 정말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삼백 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게 오랜 것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르네는 검은 것을 콜록거리며, 삼백 번째 매그너스를 끌어안았다. 가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기 위해.
삼백 한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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